오랜만에 분노가 일어서 글을 쓴다. PD수첩 <누굴 위해 법을 만드나> 편을 본 소감과 요즘 화두인 정치개혁에 대한 글이다.
또 부모가 무릎을 꿇었다.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열일을 제쳐두고 국회로 갔다. 다시는 세상을 이미 떠나버린 자기자식처럼 다른 아이들은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면 죽겠다고. 국회로 간 이유는 하나, 안전장치를 법으로 강제하거나 가중처벌 규정을 두어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민식이법은 어린이 보호구역 내 신호등과 과속단속 카메라 설치 의무화 및 구역 내 교통사고 사망 발생시 형을 가중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준이법은 경사진 주차장에 고임목과 미끄럼 주의 안내판을 설치하는 내용이다. 이제는 법의 이름으로만 남겨진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법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12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될 때까지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보는 이들마저 답답한 가슴을 턱턱 치게 하는 숨 막히는 시간이 PD수첩 <누굴 위해 법을 만드나>에 담겼다.
교통사고 등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모였다. 민식이, 하준이, 해인이, 한음이, 태호, 유찬이. 다시는 같은 이유로 자식을 잃는 부모가 없도록 법제정을 요구했다. 여야가리지 않고 민식이법, 하준이법 등을 ‘민생법안’이라 이름 붙였다. 민생법안은 여당과 야당의 힘겨루기에 통과가 한없이 미뤄졌다. 여당은 제1야당 탓을 했다. 자식을 잃고 국회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에게 제1야당을 설득해달라 했다. 제1야당은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걸고 협상을 하려했다. 제발 법 좀 통과시켜달라고 무릎 꿇고 빌며 이야기하는 부모에게 자기네들 덕으로 법사위를 통과했다며 생색을 낸다. 필리버스터의 재물이 되어 절망한 부모들이 국회에서 울며 호소했다. 당신들이 애초에 할 일들을 잘 했더라면, 잃지 않았을 아이들이라고 말이다. 국회에서 무릎 꿇고, 울며 호소하고, 또 일이 틀어져 쓰러져 통곡할 때면 언론의 플래시가 잔인하게 켜졌다. 잔인한 시간을 거쳐 겨우 민식이법과 하준이법이 12월 10일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제1야당이 민식이법 등 발목 잡은 건 왜일까?
제1야당은 선거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는다면, 민식이법 등 민생법안을 먼저 통과시키자 했다. 그렇지 않다면, 상정된 모든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해 법안 통과를 막겠다며 큰소리쳤다. 제1야당의 존재이유를 묻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1야당은 별이 된 아이들의 이름을 딴 법안 통과를 정쟁의 협상카드로 들먹이며 국민을 입에 담는 후안무치였다. 민식이법 등 의결 전에 새로 선출된 제1야당 원내대표는 협상에 다시 임하되 가장 적게 잃고 가장 많이 얻는 협상을 하겠다며 밝혔다. 그들이 가장 많이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의석’이다. 제1야당은 선거법 개정안 내용이 나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법 개정안에 따르면 그들이 선거 때마다 이야기 하는 ‘국회의석 과반수 확보 목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선거법으로 인해 국회가 국민의 의사를 왜곡해서 담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정치개혁논의는 시작되었다. 지난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이 33% 정당지지율, 더불어민주당이 25% 정당지지율을 받았다. 비례대표 도입취지에 따르면 두 거대야당이 총 국회의석 300석 중 174석(전체 중 58%)을 갖는 것이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두 거대야당은 전체 의석 중 80%에 가까운 의석을 갖고 있다. 두 거대야당은 ‘민생’을 볼모로 잡고 실상은 둘이 번갈아가며 ‘국회 내 제1당 차지하기’와 ‘대통령 배출하기’ 등을 통해서 여야가 공생해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정치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국회 중 가장 여러 개의 정당으로 구성된 제20대 국회에서 ‘정치개혁’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런 행보였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의결하여 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고 있다. 국회 의석 총 300석은 현행으로 유지하되 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으로 현행보다 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석수를 비례대표 의석을 할당할 때 연동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고 있다. 지난 총선을 예로 들면, 33%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을 얻은 자유한국당은 총 99석 의석을 갖는 것이 맞다. 단, 지역구에서 99명 이상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당선됐다면, 비례대표에서 자유한국당의 의석을 더 갖지 못한다. 지난 총선 때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시행됐다면,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에서 의석을 배분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지역구에서 정당지지율 이상의 의원이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거대정당 입김이 센 탓인지,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5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고 있다. 비례대표 중 절반만 연동시키겠다는 복잡한 계산을 해서라도 거대정당이 한 석이라도 더 가지려 하는 것이다. 즉,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다음 총석에서 지금과 같은 의석을 유지할 수 없다. 한 석이라도 잃게 된다. 그래서 별이 된 아이들 이름을 팔아 자기 자리를 지키려 하는 자유한국당을 후안무치라 욕하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개정되면, 정말로 민의가 반영되나?
정당득표율 대로 제대로 국민의 뜻을 국회에 반영하려면, 전면적 완전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것이 맞다. 또, 전체 득표 중 3% 이상 지지를 획득해야한다는 봉쇄조항 역시 없어져야 맞다. 하지만 이미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상정된 상황이니, 개정안 내용 중 민의를 살피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 톺아보아야 한다. 개정안 내용에 따르면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의 후보자명부는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작성’한다고 되어 있다. 지역구 250석 비례대표 50석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비례대표 역시 6개 권역으로 나뉜다고 가정해보면, ‘전체 득표 중 3%’ 봉쇄조항이 더 강화되는 결과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방안이 아니다.
소선거구제 선거의 지역구에서 아깝게 당선되지 못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석패율’ 제도에서도 더 강해진 봉쇄조항을 확인할 수 있다. 개정안 내용 중 지역구국회의원선거에서 지지율이 5% 미달일 경우, 비례대표당선 순위라 하더라도 당선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석패율제 자체가 거대 정당 유력 정치인에게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정당이나 신생정당에게 더 불리하게 설계된 것이다.
또 다시, 자식 잃은 부모가 국회의원에게 무릎 꿇게 하지 않으려면?
지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자식이름을 법에 담은 부모들이 있다. ‘이해관계의 충돌’을 이유로 통과되지 못한 해인이, 한음이, 태호·유찬이의 부모가 피멍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들 이름이 담긴 법안통과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협박이나 일삼던 20대 국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또 다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국회의원에게 무릎 꿇지 않게 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 20대 국회와는 다른 21대 국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개혁이다. 거대양당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민생법안을 볼모로 잡아 국민의 가슴에 피멍 들게 하는 것을 못 하게 해야 한다. 이들의 ‘의석’이라는 기득권을 유지해준 선거제도를 고쳐나가야 가능한 일이다. 한계가 있지만 이미 선거법 개정안을 필두로 한 정치개혁 주사위는 던져졌다. 제대로 민의를 담고 싶다면, 봉쇄조항 강화하는 비례대표 권역별 명부 도입 및 석패율 최소 지지율 기준 등을 삭제하고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무섭게 여기고, 약자를 위해 일하는 국회 만드는 최소한의 개혁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하여 실렸습니다. http://omn.kr/1lu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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