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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하루

180519-20, 38주년이 된 광주민중항쟁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10일간의 광주민중항쟁 이후로 38년이 흘렀습니다. 역사책에야 광주민중항쟁의 기간이 적혀있지만, 광주민중항쟁 관련한 #metoo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누군가에겐 10일이었을 항쟁이 누군가에겐 아직도 진행형이겠구나 싶습니다. 세상에 내 이야기를 내놓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숨죽이고 살아야 했을까요.

38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국민을 학살하라고 명령한 책임자의 처벌, 그 아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광주민중항쟁을 단지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했던 엄혹한 시간들, 새로운 진실과 여전히 먼 진상규명 사이에서 평화캠프 2018광주역사기행 <청년, 광주를 가다>를 준비하는 마음이 한없이 무겁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한달간, 광주역사기행에 다녀온 참가자들의 수기공모전이 진행됩니다. 주최측인 저는, 수기공모엔 참가하지 못하지만 준비하면서, 광주에서 겪은 몇가지 에피소드를 나누고자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이 순간에 말입니다.

#1. 518묘역에서 유가족을 만나다.

이번 광주역사기행에서는 묘역부터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매년 묘역에 짧게 있어서 아쉬웠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거든요. 긴 시간 버스로 이동해서 고생한 참가자들과 도착하자마자 주문한 도시락부터 먹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지네에 물렸다고 했습니다. 통증이 심해져서 얼른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마침 묘역에 있었던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기사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유가족이었습니다. 딸과 함께 묘역에 왔다가 나가는 길, 동료를 우연히 만난거죠. 데려가주신 병원은 ‘광주병원’, 518광주민중항쟁의 사적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어디서 왔냐, 왜 왔냐는 대화를 나누며 광주민중항쟁으로 택시기사의 형이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5월18일이나 그 날이 있는 주말이면, 형의 바로 옆 묘역에서 언제나 한 할아버지가 울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택시기사님은 그 할아버지를 위해 국화를 늘 준비하셨구요. 그런데 그 날은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았다고 걱정이 된다며 미리 준비하신 국화는 동료를 주었다고 합니다.

도착한 병원에서도 택시기사님의 딸은 굳이 차에서 내려서 응급실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또 연결되고 인연이 닿는 일들이 죄송하고 감사한 이야기였습니다.

#2. 518묘역 참배에서..


항상 구묘역에서 신묘역을 가서 잘 몰랐는데, 신묘역 입구로 들어오니, 단체로 참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행진할 때의 그 무거움, 그 깊이를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함께 참배를 드린 후, 약 한 시간 30분 동안 자유롭게 모역참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둠별로 묘역을 돌아다니며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다른 준비들이 됐는지 체크한 후, 저도 한 모둠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행이 아닌 한 여성과 참가자 중 한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저를 불러 혹시 자료집이 남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시간을 묘역에 있을 계획으로 남는 자료집은 차에 두고 내렸다고, 어떤 사유로 자료집이 필요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알고보니 모둠별로 묘역참배를 할 때, 그 모둠은 김의기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어떤 이유로 김의기열사릉 소개하느냐고 물으며 대화가 시작됐다 합니다. 본인은 김의기열사와 함께 삐라를 뿌리고 잡혀간 남편을 둔 사람으로 소개하셨고, 그래서 김의기열사에 대한 설명이 적힌 자료집을 갖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사연을 듣고 옆 사람과 함께 보면 된다고,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자료집을 선뜻 내밀었습니다. 1980년 5월 30일, 단지 광주민중항쟁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날렸던 이를 함께 기억한다는 것이 뭉클했습니다.



#3. 윤상원열사와 함께 한 사람들


묘역을 참배하고, 광주민중항쟁을 직접 경험하신 분들과 집담회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몇년째 이 집담회를 준비해주시는 분은 올해는 마지막 도청을 지킨 사람들을 모셨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윤상원열사와 함께 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들불야학 1기를 졸업했다던 분은 당시 5월18일 소식을 늦게 듣고 들불야학의 사람들과 민중항쟁에 합류했다고 했습니다. 윤상원 열사와의 에피소드를 몇가지 소개해주셨는데, 여전히 울먹이며 말씀해주신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습니다. 마지막 도청에서 총을 나누고 있는데, 윤상원 열사가 자신에게 총을 주지 않아 윤상원열사와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 뺏다시피 총을 가지고 가려는 찰나에 윤상원열사가 이름을 부르며 “조심해라”라고 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고. 이 이야기를 하시며 결국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4.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반기는 광주


그 다음날도 윤상원열사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오월길재단의 해설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윤상원열사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박관현열사의 연설을 기억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지그시 말을 건네오셨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 이후로 참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방문하고 있다고, 진작 이렇게 알려져야 했을 일이 이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게 되서 다행이라고. 내년에도 또 오라고. 그리고 내년엔 자유공원을 꼭 가보라고.

#5. 아픈 현대사를 안고, 지역에 기여하는 사람들

전남대학교를 돌며 열사에 대한 이야기,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시아문화전당으로 갔습니다. 때마침 당시의 전남도청이 개방되어있었습니다. 날짜별로, 그 날에 있었던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제가 있었던 그룹의 설명을 담당해주신 분은 파독간호사이셨습니다. 딸을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셨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광주민중항쟁 당시에 다친 사람들을 돌보고 돌아가신 분을 수습했던 일을 한 사람들은 정말 고맙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자신도 파독간호사였기 때문에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광주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에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지역에 기여하고 계셨습니다.


이명박, 박근혜정권에서 구 전남도청에 남아있는 광주민중항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을 배우기 위해 방문한 외국인들이 왜 총알자국이 없느냐고 물어보면, 두 정권에서 흔적을 지우기 위해 리모델링을 했다고 설명하신다 했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이 계단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광주민중항쟁 마지막 날 전남도청을 담은 장면에서 본 피가 흥건했던 계단말입니다.

#6. 4년만에 직립한 세월호를 마주하다


세월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숙연해지고, 눈물을 보였습니다. 저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장면들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광주역사기행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현수막에 담고 싶은 말을 적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밥을 먹다 한 참가자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막아서 죄송했습니다. -당시 의경이”라고 적었다고요. 정말 당시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유가족들이 어떤 마음으로 싸우는지 잘 몰랐다고, 왜 이제야 알게 된거냐고 자책하던 모습이 맘아팠습니다. 누군가에게 그의 진심이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 특별히 기억하는 누군가

언젠가 광주역사기행을 가기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도청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인터뷰였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계시던 모습, 그리고 98년의 어느 날 돌아가셨다고... 묘역을 갈 때마다 그의 묘역앞을 가게 됩니다. 들불야학에서도 활동하셨던 김영철열사는 집담회에서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이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듣게 되는 그의 이름은, 또 반갑기도 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썼습니다. 이번 광주역사기행은 함께 했던 사람들과 혹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느낀 것이 더 많았던 기행이었습니다. 또 지금 어딘가에서는 ‘사람’을 위해 애쓰는 누군가에게 감사하겠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가장 큰 정신은 ‘대동정신’이라던 그 말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